삼국지 인물열전 - 조조

삼국지 인물열전 - 조조

    삼국지 인물열전 - 조조


    전한시대 유방의 심복으로 재상을 지낸 조참의 자손이다. 할아버지는 조등이며 환관을 지냈으며, 환제때 중상시를 맡았다. 아버지 조숭은 하후씨에서 데려온 양자이다. 패국 초현 출신이며, 어렸을 때 이름은 ‘길리’ 또는 ‘아만’이었다.  조조는 어려서부터 눈치가 빠르고 민첩했으며, 권모술수가 있었으나 사내다움을 뽐내며 멋대로 놀기를 좋아해 덕행과 학업을 닦는 일을 등한시 했다.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를 뛰어난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교현과 하옹만이 그를 남다른 인물로 알아주었다.


     

    조조는 교현의 권유로 허소와 친분을 갖게된다. 어느날 허소에게 ‘저는 어떤 사람인가요?’라고 묻자 허소는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란 대답을 듣고 조조는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조조는 20세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이 되고 낙양북부위에 임명된다. 이어서 그는 돈구현의 현령이 되었다가, 조정으로 불려가 의랑으로 임명되었다.


     

    황건적의 난


    184년 조조가 30세에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다. 조조는 기도위로 임명되고 영천의 적을 토벌하고 이 공적으로 제남국의 재상으로 승진, 거기에서 그는 역시 강력한 법을 세워 뇌물과 향락에 물든 상급 관리 8할을 파면하고, 당시 유행하던 사이비 종교나 미신 부류를 모두 금지시킨다. 그 후 동군태수로 임명되지만 부임하지 않고 병을 핑계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고향에서 사냥과 독서를 즐기며 은거 활동에 들어갔다.  얼마 되지 않아, 기주자사 왕분, 남양사람 허유, 패국사람 주정등이 호걸 등과 연합하여, 영제를 폐위하고 합비후를 옹립할 계획을 세우고 조조에게 알렸지만 조조는 거절하고, 왕분 등의 계획은 결국 실패한다.  금성 사람 변장과 한수가 자사와 군수를 살해하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무리가 십수만 명이나 되어 천하가 어지러웠다, 이 일로 조조는 전군교위로 임명되었으나, 그 무렵 영제가 죽고 태자 유변이 즉위하여 소제가 되었으며, 하태후가 조정을 장악하였다.

     

    십상시의 난


    대장군 하진은 원소와 더불어 십상시를 제거하려 계획하였지만, 하태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하진은 동탁을 비롯해 각지의 제후들을 불러들였지만, 동탁이 낙양성에 도착하기도 전에 하진은 환관들에게 제거 되었다. 동탁은 낙양에 도착해 황제를 폐위해 홍농왕으로 삼고 진류왕 유협을 옹립에 헌제로 삼으니 조정이 크게 어려웠다. 동탁은 조조를 효기교위로 삼고 협조를 구하지만 조조는 성과 이름을 바꾸고 고향 초현으로 돌아가려 하였다.

     


    반동탁 연합군


    189년(중평 6년) 12월, 조조는 사비를 털어 군사를 모으고 기오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각 지역에서 일어난 군대의 숫자만 수만이 넘었으며, 원소를 맹주로 추대 하고 조조는 분무장군의 직무를 대행한다. 동탁은 군대를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천자를 협박하여 도읍을 장안으로 옮겼다. 동탁은 낙양에 남아있다가 한나라 궁실을 불태워 버렸다. 이때 원소는 하내에 주둔하고, 장막,유대,교모,원유는 산조에 주둔했으며, 원술은 남양에, 공주는 영천에, 한복은 업에 주둔하였다. 동탁에 세력이 강력해 어느 제후도 나서지 않자, 조조는 혼자서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 성고를 점령하려고 하였으나, 장막만이 장군 위자에게 병사를 나눠주어 조조를 따르게 했다.  이들은 형양 변수에서 서영과 교전하였으나, 패하여 병사들 가운데 대다수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다. 산조로 돌아온 조조는 제후들에게 동탁을 격파할 전략을 제시했지만, 서로 눈치만 보고 움직이지 않다가 결국 연합군은 와해된다


     

    191년(초평 2년) 7월 원소가 한복을 위협하여 기주를 빼앗을 때, 흑산적 우독,백요,휴고등 십여만명이 위군과 동군을 공략하였다, 조조는 흑산적을 토벌하고, 원소로부터 동군태수로 임명된다. 다음해엔 청주의 황건적 100만명이 연주로 침입하였고, 연주자사 유대가 살해되자, 제북상 포신등의 천거로 연주목에 임명된다. 포신이 전사하는등 큰 타격을 입었지만 마침내 적을 격파하고, 제북까지 추격하여 황건적이 항복하자 조조는 이들을 흡수한다. 그 가운데 정예 병력을 선발해 청주병으로 삼았으며, 이 때부터 조조에게 유능한 사람들이 부하가 된다.


     

    서주 대학살 ~ 여포 제거


    이때 원소와 원술은 사이가 나빠진다. 원소는 형주의 유표와 연합하고, 원술은 유주의 공손찬, 서주의 도겸과 손을 잡는다. 이 때 조조는 원소의 수하에 불과했고, 유비와 손견은 각각 공손찬과 원술의 수하일 뿐이었다. 조조는 원소와 연대해 각지에서 원술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원술은 본거지를 버리고 양주로 도망가게 하였다.  하비사람 궐선이 수천의 군사를 모아 놓고 스스로 천자라고 일컬었다. 서주목 도겸은 그와 손을 잡고 함께 태산군의 화현과 비현을 빼앗고 임성을 공략했다. 조조는 도겸을 정벌하고 십여성을 함락하는데, 도겸은 성을 굳게 지킬 뿐 감히 싸우러 나오지 못했다. 이전에 조조의 부친 조숭이 관직을 버리고 초현으로 돌아왔는데, 동탁의 난이 일어나자 낭야로 피난을 갔다가 도겸에게 살해당했다. 그 때문에 조조는 도겸을 정벌하려 복수하려고 마음 먹었다. 두 차례에 도겸 정벌에 나서 서주에서 무차별 살육을 자행한다.


    조조가 서주를 공격하는 사이, 친우였던 장막과 연주를 지키던 진궁이 반란을 도모하여 여포를 맞이하자 군과 현이 호응하였다, 순욱과 정욱은 견성을 보위하고, 범과 동아 두현을 굳게 지키는데,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조조는 복양에서 궁지에 빠지고 전국을 휩쓴 메뚜기의 피해로 큰 타격을 입었으나, 2년에 걸친 공방 끝에 연주를 평정하는데 성공 한다.  197년(건안 원년) 헌제를 옹립하여, 대장군으로 임명되고, 수도를 낙양에서 허창으로 옮긴다. 이때 유비가 여포에게 하비성을 빼앗기고 조조에게 도망온다.  장제는 관중에서 남양으로 도망갔다. 장제가 죽자 조카 장수가 그의 군대를 이끌었고 조조가 완성으로 가자 장수는 항복하였지만, 오래지 않아 후회하고 다시 반란을 일으킨다. 이 싸움에서 조조가 패하고 맏아들 조앙과 조카 조안민이 죽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전위가 조조를 지키기 위해 전사한다.


     

    원술이 진국에 침략하였으나, 조조가 직접 공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버리고 도주하면서, 장수 교유,이풍,양강,악취등을 남겨 지키도록 하였다. 조조는 교유등을 쳐부수고 모두 목을 베었으며, 원술은 회수를 건너 도망쳤다. 조조가 양현에서 장소를 포위하자 유표가 병사를 파견하여 장수를 구원하고, 조조군의 퇴로를 막았다. 안중현에서 장수,유표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여포가 원술을 도와 고순에게 명하여 유비를 공격하게 한다. 조조는 하후돈을 파견하여 유비를 구원하려 했지만, 패배하였다. 조조는 직접 동쪽으로가 여포를 크게 무찌르고 하비성 아래까지 추격하였다, 송헌,위속등이 진궁을 사로잡고 성을 바치며 투항하자, 조조는 여포와 진궁을 생포해 죽였다.  다음해 원술을 토벌하고 장수를 항복시킨다. 그러나 원술 토벌에 파견한 유비가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서주를 차지하였으나, 조조는 친히 동쪽으로가 유비를 격파하고 유비의 처자식을 붙잡음과 동시에 관우를 항복시켰다. 유비는 원소에게 도망치고 마침내 원소와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루게 된다.


     

    관도대전


    원소와 천하 패권을 다투는 전초전은 먼저 백마에서 치러진다. 여기에서 조조는 원소 부하인 맹장 안량과 문추를 물리치고 전투를 유리하게 이끈다. 원소가 진영을 연결해 조금씩 전진하며 모래 언덕에 진을 치자, 조조 또한 진영을 나누어 대치했지만 불리한 싸움이었다. 날이 갈수록 점차 불리해 지자, 조조는 순욱에게 돌아갈 방법을 상의하였지만, 순욱은 격려의 답장을 보내 그곳에서 버티게 한다. 마침내 원소의 모사인 옛 친구 허유가 투항하고 고시와 오소에 있는 원소의 병참사령부를 습격하기를 진언하였다. 조조는 오소 기습전에 앞서 원소의 본진 습격에 대비해 방비를 단단히 한 다음 원소군으로 위장하여 특공대를 이끌고 침입한다. 오소의 식량과 군수물자들을 모조리 불살라버림으로서 형세는 역전되고, 원소군은 완전히 무너지고 만다. 그 후에도 북진을 계속하여 원씨 세력을 철저히 격파한다.


    적벽전투


    208년 조조는 승상의 지위에 오르고, 형주의 유종을 항복시키고 유비를 정벌하기 위해 강릉에서 출발하자, 손권은 유비를 위하여 합비를 공격한다. 파구산에 이르러 장희를 파견해 합비를 구원하도록 했다. 손권은 장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주한다. 조조는 적벽에서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하였다. 이때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정사]  [연의]에서는 화공으로 조조군을 전멸시키고 조조는 가까스로 퇴각하고, 도중에 세번이나 기습을 받다가 마지막에는 관우가 도망치는 것을 묵인해 주는 것으로 나온다.


     

    삼국정립


    210년(건안 15년) 동작대를 건축하고 천자는 조조의 세자 조비를 오관중랑장에 임명하고 관속을 두어 승상을 보좌하도록 했다.  211년에는 마초와 한수등이 관중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조조가 토벌을 나섰다. 마초등이 산과 요새에만 있을 뿐 견벽거수로 일관하자 서황의 진언을 옳게 여기고 진을 건너는 척하며 대기중에던 병사로 그들을 습격하여 격파한다. 또한 이때 흙을 쌓아올려 성벽을 만들고 물을 뿌려 하룻밤 사이에 얼음성을 완성시켰다고 한다. 가후의 이간책으로 마초와 한수 사이가 벌어지게 하여, 적을 물리치고 관중을 평정했다.



    213년 조조는 유수구로 진군하여 손권이 있는 장강의 서쪽 진영을 깨뜨리고 손권의 도독 공손양을 포로로 잡아 군대를 이끌고 돌아 왔으며, 천자는 어사대부 희려에게 지절을 주고 조조를 위공으로 책봉하였다.


    214년 마초가 한양에서 다시 강족과 호족을 등에 업고 반란을 일으켰고 저족의 왕 천만도 마초에게 호응하고 쳐들어 왔지만, 하후연에게 토벌되었다. 마초는 한중으로 달아났고, 215년 한중의 장로를 항복시켰다.


    216년 천자는 작위를 높여 조조를 위왕으로 삼았다.


    217년에 손권과 다시 싸우고, 유비가 장비,마초,오란등을 파견하여 하변에 주둔하도록 하니 조조는 조홍을 파견하여 막게하였다. 결국 한중 전투가 벌어지고 하후연이 죽는다. 이후 유비가 한중왕의 즉위하자 분노하지만 사마의의 권유로 오의 손권과 동맹을 맺는다. 관우가 양양을 빼앗고 번성을 포위하여, 우금,방덕을 보내 구원하게 하지만 우금은 사로잡히고 방덕은 처형당한다. 이에 조조는 손권에게 형주를 공격하게 하고 2차 구원병으로 서황등을 보낸다. 서황 덕에 번성의 어려움은 풀리고 양양도 되찾게 된다. 그 후,서황에게 양양을 지키게 한다. 관우를 죽인 손권은 유비가 두려워 관우의 목을 조조에게 보낸다. 그런데 이를 눈치챈 조조는 관우를 왕후의 예로 제사 지낸다. 관우가 죽은 이듬해 220년 1월 23일 조조가 낙양에서 66세의 나이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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